사소한, 사소한 우리들의 정의
사소한 정의(원제: Ancillary Justice)는 2013년 발표된 앤 레키의 SF소설이며, 놀랍게도 데뷔작입니다. 중년의 나이에 6년에 걸쳐 출판한 첫 소설로, 출판하자마자 네뷸러상, 로커스상, 휴고상, 아서 C.클라크상, 영국판타지문학상, 영국SF협회상, 키치상을 수상했습니다. 사실 처음 책을 접할 때 실수로 두 번째 작품인 사소한 칼을 먼저 읽기 시작했습니다. 설명 없이 이어지는 SF묘사에 불친절하다며 투덜댔지만 묘하게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다행히 잘못된 순서를 깨닫고 바로 사소한 정의를 읽게 되었습니다.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흡인력 있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사소한 정의, 사소한 칼, 사소한 자비로 이어지는 3부작을 단숨에 읽어내려갔으니까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세밀히 묘사하는 기술이 탁월했습니다. 하드 SF는 아닌 것이, 그다지 공학적, 기술적인 서술이 많지는 않았으나, 이 라드츠 세계는 충분히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집단 지성체에 대한 아이디어는 예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앤 레키가 창조한 세상에서 그것은 좀 더 세련되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라드츠 제국의 수장인 미아나이가 소유한 수천 개의 인체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매우 매력적이고 새로웠습니다. 감정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 인격이 주인공인 셈인데, 그 감성적인 묘사조차도 진부하지 않고 섬세합니다.
친숙하지만 끔찍한 세계
기존 우리가 친숙하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꽤 많이 전향시켜버리므로 소설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보조 우주선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 저스티스 토렌인 거대한 우주선의 인공 지능에 노예화된 것 같은 인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라드츠 제국의 우주선은 모두 지각이 있는 인공지능이며, 같은 네트워크에서 인격과 정보를 공유하는 한 부대의 군인들이 주둔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한 번에 수천 개의 장소에 있을 수 있으며, 그의 부대가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행성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제어하고, 일종의 로봇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여 낯설게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상황에 맞게 표정, 몸짓, 자세, 억양에서 상황을 추론하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좀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보조체
라드츠는 군사 제국입니다. 다른 항성계를 합병 후, 토착민을 노예화합니다. 그 시체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인공지능의 보조체로 이용하기 위해) 극저온 저장소에서 보관합니다. 그들의 인격은 제거되고 우주선 인공지능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주인공은 저스티스 토렌이라는 우주선의 인격과 정보를 공유하는 보조체입니다. 그런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녀의 감각이 저스티스 토렌에서 분리되어 우주선은 파괴되고, 주인공만이 저스티스 토렌으로 남게 됩니다. 보조체는 인간이 아니지만, 주인공은 왜 우주선이 파괴되었는지 알아내고 그녀가 사랑한 대위를 죽인 미야 나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우주를 헤쳐나갑니다.
성별이 없는 세상
라드츠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성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앤 레키는 성별은 존재하되, 그 혹은 그녀라는 단어가 없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3인칭을 지칭할 때는 모두 그녀로 통일됩니다. 소설 내내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간주되며 실제로 의미도 없습니다.
주인공은 라드츠가 아닌 문화에 있을 때마다 고민하게 됩니다. 남성과 여성을 지칭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각 성별에 대한 모욕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매우 매력적인 발상입니다.
굉장히 재미있다!
올해 읽은 최고의 SF소설입니다. 아이디어와 스토리가 완벽히 조화로웠으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고, 또한 즐겁게 사유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앤 레키는 매력적인 스타일의 문장 구성으로 새로운 스페이스 오페라의 배경을 열었습니다. 인종차별, 계급 차별, 식민주의, 성 정체성 등의 문제가 이야기를 압도하지 않게 하는 좋은 구성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식민정책에 대한 반감도 어쩌면 책의 흥미에 한 점 더 보탰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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